온로드와 오프로드 모두 만족, 예쁜 건 덤이다

국내에서 어필하기 쉽지 않은 분야가 있다. 바로 오프로더다. 국토 대부분이 포장도로, 그것도 포장 질이 수준급인 경우가 세계적으로 흔치 않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는 온로드 인프라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자동차라는 존재는 어떤가? 유럽이나 미국이야 자동차는 철저한 이동 수단이자 도구로 쓰인다. 유럽은 주차 공간이 제한적이며 범퍼로 다른 차를 밀면서 들어가는 모습도 종종 볼 수 있다. 그들에게 범퍼는 긁히라고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꿈도 못 꾼다. 자동차로 자신의 능력을 포장하는 경우도 있고, 그만큼 과시 또는 보여주기 위한 측면도 크다. 캐피탈 인프라까지 좋다 보니 당장 큰돈이 없어도 고급 수입차를 쉽게 구입할 수도 있다. 할부 개월과 잔액이 많이 남아있을수록 내 차에 대한 사랑은 비례 증가한다. 아끼고 아낄 수밖에 없다.

매우 제한적인 비포장 도로, 자동차를 자식처럼 아끼는 이러한 문화 조건 속에서 정통 오프로더가 설자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수준이다. 누가 대당 2억 원짜리 AMG G 63으로 바위나 협곡을 다닐 생각을 할까? 작은 상처라도 나면 난리가 날 것이 뻔하다.

그러다 보니 정통 오프로더는 국내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어렵다. 지프(JEEP) 랭글러가 왜 차축의 두께를 강조하는지, 벤츠 G 바겐이 왜 후륜 외에 전륜까지 디퍼렌셜 락 기능을 달았는지도 관심 밖 내용이다. 그렇다 보니 존재감 큰 패션카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러한 추세가 단순히 국내에 국한된 것은 아닌 듯하다. 세계의 많은 소비자들이 정통 오프로더를 실제 오프로드 주행 목적이 아닌, 다목적 활용성에 초점을 맞춰 구입하고 있다. 여기에 디자인은 덤이다. 미국만 봐도 정통 오프로더인 포드 브롱코 보다 기능과 가격을 덜어낸 일반 SUV인 브롱코 스포트가 더 많이 팔린다.

랜드로버 디펜더는 바로 이런 트렌드를 직시하고 개발된 신세대 오프로더다. 일상 용도로 사용할 때는 고급 SUV로, 때에 따라 최대 3.5톤까지 견인 가능한 트랙터(트레일러를 끌고 가는 자동차)로 활용할 수도 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험로를 통과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췄다. 디자인도 눈길을 끌도록 만들었다.

우리가 테스트한 모델은 디펜더의 숏바디 모델인 90 사양이다. 길이를 제외하면 전면과 후면 디자인이 롱바디 모델인 110과 같다. 디펜더 90은 짧아진 차체 길이 덕분에 쿠페처럼 도어를 2개만 달았다.

전체적으로 귀여운 디자인이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덩치가 제법 크다. 디펜더 110은 제원상 대형급 SUV와 비교될 정도다. 디펜더 90은 여기서 길이만 줄인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그럼에도 전체 길이는 현대 투싼과 거의 비슷하다. 이 정도 큰 차체에 도어만 2개를 달고 나온 것이다.

실내 디자인에서도 디펜더 만의 개성이 잘 드러난다. 나사로 조립된 모습에서 투박함도 나타나는데, 너무 터프하다거나 촌티도 없다. 오히려 디펜더의 분위기를 더욱 잘 보여줄 뿐이다. 특히 각종 고급 소재를 많이 넣어 고급스러운 느낌도 키웠다. 정통 오프로더라기 보다 고급 SUV 느낌이 더 짙다.

디스플레이 계기판에서 각종 테마도 바꿀 수 있다. 구동 배분과 디퍼렌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부분이나 운전자 보조 기능을 크게 보여주는 부분도 랜드로버만의 특징이다.

피비 프로라는 이름의 최신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은 기존 다양한 문제점들을 잘 해결했다. 해상도도 좋고 반응속도 역시 빨라졌다. 홈에서는 타일 노출 방식을 통해 직관적으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는데, 메뉴는 스마트폰을 연상시키도록 꾸몄다. 각종 오프로드 정보도 볼 수 있으면서 도강 센서를 활용해 현재 수심을 알 수 있도록 한 점도 랜드로버가 보여주는 특화된 부분이다. 과거엔 블루투스 연결이 불안정한 경우도 있었지만 최근 나온 신차에서 이 문제는 발견되지 않는다.

시트는 3개의 메모리 기능을 지원한다. 다만 열선 외 통풍 기능을 지원하지 않는다. 차량 가격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나오는 부분.

뒷좌석을 위한 도어가 없어 2열로 탑승하려면 앞 좌석 시트를 안으로 접어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슬라이드 버튼을 한 번만 눌러도 시트가 앞으로 이동해 편하다. 하지만 반면 제자리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버튼을 계속 누르고 있어야 한다는 점은 불편했다. 컨버터블이나 쿠페 일부도 이와 같은 방식인 경우가 많은데, 원터치로 바꾸면 좋겠다.

뒷좌석 공간은 넉넉하다. 계단식 구조라 뒷좌석 시트가 앞좌석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자리한다. 뒷좌석 탑승객 시야 확보에 유리한 구조다. 앞좌석 시트백 부분에 USB 포트를 달았고 중앙 하단에 타입 C 충전 포트를 준비하는 등 기기 확장성에도 신경 쓴 흔적을 보인다.

다만 숏바디 모델로 변경되면서 트렁크 공간이 크게 줄었다. 대부분을 실내 공간에 할애했다고 보면 된다. 부가적인 트렁크 공간이 필요하면 2열 시트를 접어야 한다. 대신 230V 전원 등이 부가 기능의 아쉬움을 채운다. 의아한 부분은 테일게이트에 소프트 클로징 기능을 넣었다는 것. 흔치 않은 구성이다. 다만 2개의 도어에는 이 기능이 빠져 있다.

부가 기능을 더 보자. 스마트폰 무선 충전 시스템, 센터 암레스트 안쪽에 자리한 냉장고, 앰비언트 라이트, 360도 전방위 카메라와 차체 하부를 보여주는 클리어사이트 그라운드뷰, 14개 스피커가 탑재된 메리디안 사운드 시스템 등 편의 장비들을 갖추고 있다.

메리디안 사운드 시스템은 우리 팀원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다. 각종 악기들의 소리를 섬세하게 표현해 줄 뿐만 아니라 출력이나 밸런스 부분 모두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다. 디펜더와 함께 장거리 이동을 할 때 사운드 시스템은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할 것이다. 혹자는 기아 K8에도 메리디안 사운드 시스템이 달린다고 얘기할 것이다. 그러나 수준이 다르다. 차 값만 2배 차이가 나는데, 동일한 사운드 시스템을 채용한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얘기겠지만.

시동을 걸어 잠든 디펜더를 깨운다. 부드럽고 고급스럽게 엔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디펜더 90에는 직렬 6기통 디젤 엔진이 탑재되는데, 여기에 48V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추가했다. 6기통 엔진의 부드러움에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더해져 엔진 시동이 걸릴 때 불필요한 진동을 만들지 않는다. 참고로 디펜더 110 모델에는 4기통 디젤 엔진이 탑재된다.

조용하다. 소음 진동에 대한 부분을 최대한 억제시켰다. 스티어링 휠이나 시트, 페달 등에서도 진동도 느껴지지 않는다. 흡음재도 아낌없이 사용했는지 ‘겔겔’거리는 디젤 소리보다 중저음의 울림소리만 잔잔하게 들릴 뿐이다. 아이들 상태에서 정숙성을 확인해본 결과 37.0dBA을 보였다. 기아 K7 3.3, 캐딜락 CT6 3.6과 같이 고급 모델을 지향하는 세단의 정숙성과 동일한 수준이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감각은 주행을 시작해도 여전히 지속된다. 요철도 무심하게 지나치고 올-터레인 타이어가 장착됐음에도 타이어에서 전달되는 특유의 질감적 특성이 전해지지 않아 좋았다. 승차감 좋은 고급 SUV를 운전하는 느낌이 컸다.

오프로드용 4륜 시스템을 갖추고 있으면 디퍼렌셜 혹은 트랜스퍼 케이스 쪽에서 약간의 유격을 갖게 되고, 가속 페달을 밟고 뗐다 다시 밟을 때 ‘텅’하는 작은 충격이 발생되는 경우가 많다.(일부 온로드 4륜 시스템도 이러한 충격을 전달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디펜더에서 이런 충격은 느껴지지 않았다. 세심한 부분도 놓치지 않고 튜닝 완성도를 높인 결과다.

뭔가 묵직하게 움직이고 멈춘다. 기본적인 성격이 그럴 수도 있지만 디펜더 90은 몸무게도 꽤 나가는 편이다. 직접 측정한 디펜더 90의 중량은 2383kg. 사람이 1명만 탑승해도 2.4톤이 넘는다.

때문에 빠릿하고 날카로운 움직임은 기대하기 힘들다. 하지만 무게를 감안했을 때 움직임은 좋았다. 이에 일상 영역에서는 차의 주행 특성이 아쉽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묵직하지만 부드럽고 원하는 만큼 가속과 감속 모두를 잘 해준다. 여기에 승차감까지 좋으니 지금 오프로더를 타고 있는 건지 고급 SUV를 운전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이런 부분이 랜드로버만의 강점이다. 한 가지 성격에 집중하면 잃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 다소 극단적이긴 하지만 지프 랭글러를 생각하면 쉽다. 오직 오프로드 성능에 집중해 험로에서는 최고의 성능을 보여주지만 포장도로에서 승차감이나 정숙성, 핸들링 등 많은 부분에서 타협을 해야만 한다.

과거의 디펜더도 그랬다. 하지만 새롭게 태어난 디펜더는 최신 트렌드를 잘 반영해 온로드 주행 품질을 크게 높였다. 차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도 디자인이 예쁘고 실내도 고급스러우며 주행 감각도 비싼 값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느끼게 할 수 있을 정도다.

온로드 주행 품질을 이 정도 높였으니 그만큼 오프로드 성능이 하락하지는 않았을까? 제한된 환경이었지만 바위를 제외한 모래, 자갈길, 각종 경사로 주행 시험을 해봤다.

오프로드 주행을 위한 준비과정? 간단하다. 일반 승용차의 주행모드를 선택하듯 노면 조건만 선택하면 된다. 바위를 타는 등 극한의 험로에 도전하겠다면 기어를 중립으로 바꾼 후 로우 레인지 버튼만 누르면 된다.

험로를 주행하면 계기판에서 4개의 바퀴 중 어느 쪽에 동력을 집중시켰는지 알려준다. 센터 및 리어 디퍼렌셜 락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모니터 상에서 보여준다. 특별한 운전법은 필요치 않다. 그냥 원하는 방향으로 스티어링 휠을 돌리고 가속 페달을 밟으면 나머지는 디펜더가 알아서 해준다.

이따금 한쪽 바퀴가 뜨거나 헛돌아도 무시하면 된다. 처음에는 바퀴가 헛도는 듯하지만 계속 가속 페달을 밟고 있으면 알아서 동력을 다른 쪽으로 배분시켜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올-터레인 타이어도 미끄러지는 현상을 최소화시켜준다.

이것이 랜드로버다. 차가 알아서 해주는 것. 온로드 주행 감각도 높이면서 오프로드 성능은 그대로 유지한 것은 다른 제조사에서 쉽게 따라 하기 힘든 영역이다. 지프 랭글러나 벤츠 G 바겐은 디퍼렌셜 설정을 비롯해 4륜 모드 등 다양한 부분을 운전자가 직접 조작해야 한다. 오프로드 주행을 위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디펜더는 몰라도 된다. 랜드로버는 오래전부터 터레인 리스펀스 시스템을 썼다. 전자식으로 알아서 제어해 주는 온로드 및 오프로드용 4륜 구동 시스템이다. 당시도 최고 수준이었는데, 지금 것은 더 성능이 좋아졌다.

쉽게 비교하자면 완전 수동식 카메라와 알아서 예쁘게 보정까지 해주는, HDR까지 먹여주는 최신 카메라의 차이라고 말하면 될까?

누군가는 디펜더가 정체성을 잃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혹자는 정통 오프로더를 다루는 재미가 사라졌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자동차 제조사는 골수팬들의 말을 듣지 않아야 성공할 수 있다.

포르쉐가 911만 만들지 않고 카이엔과 파나메라로 성공한 것, BMW M이 마니악한 면만 추구하지 않고 갈수록 편해지는 고급 고성능 차로 변해가는 것, 슈퍼카 제조사들이 SUV를 내놓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쉽지만 마니아의 수요는 제한적이다. 보다 많은 소비자들에게 경험을 시켜준다는 것, 지나치게 한쪽으로 편향되기보다 일정 수준의 대중성을 통해 자사 브랜드 경험의 기회를 넓혀가는 것이 요즘 고급차들이 지향하는 내용이다. 디펜더도 이런 변화를 선택한 것뿐이다.

가속 성능은 준수하다. 묵직하게 움직이긴 하지만 한번 탄력을 받으면 속도가 잘 붙는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데 소요된 시간은 7.93초였는데, 2.4톤 급 무게를 가진 차로는 수준급 가속 성능이었다.

반면 올-터레인 타이어 특성상 제동 성능은 제한적이다. 100km/h에서 정지하는데 이동한 거리는 44.1m로 일반적인 승용형 SUV 대비 긴 수치를 기록했다. 테스트가 반복되자 브레이크 시스템이 한계를 보이면서 제동거리가 47m 대까지 증가하기도 했다. 제동성능은 안전과 직결되는 부분인 만큼 랜드로버가 조금 더 신경을 써주면 좋겠다. 물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타이어 특성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주행 환경에 맞춰 타이어를 바꿔주면 보다 나은 제동 거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

디펜더에는 온로드, 오프로드 주행에 한 가지 더 특출난 부분이 있다. 바로 트랙터로의 활용성이다. 디펜더는 프레임 기반의 SUV가 아닌 알루미늄 모노코크 차체를 갖는다. 그런데 알루미늄을 아주 많이 사용해 튼튼한 차체를 만들었다. 덕분에 디펜더는 3.5톤의 견인중량을 갖는다. 모노코크 바디로는 이례적인 용량이라 할 수 있다. 3.5톤이란 수치는 수입 중형 픽업트럭과 비교해도 최상위권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승차감과 정숙성은 픽업트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급스럽다. 각종 편의 및 안전장비도 비교되지 않는다.

디펜더는 신세대 오프로더다. 랜드로버 자체의 역사를 대변하는 만큼 팬층도 두텁다. 그런 디펜더가 파격적으로 변신했다. 일부 팬들은 랜드로버가 변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랜드로버는 골수팬과 함께 새로운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도전을 택했다.

디펜더는 우리나라 환경에 더 잘 맞는다. 오프로드보다 포장도로 주행이 대부분이며 국내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고급감과 ‘있어 보이는’ 디자인도 갖췄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몰라도 손쉽게 오프로드 주행을 할 수 있는 기능성은 기본 능력이다. 600급 카라반도 이끌 수 있는 견인력도 무기다.

가격은 비싸다. 저렴한 트림이 8천만 원대이며, 비싸면 1억 원도 넘는다. 그러나 이런 성격의 모델은 오히려 비쌀수록 잘 팔리는 것 같다. 벤츠 G 바겐이 대표적이다. 고가의 가격을 가진 고급차.

남은 것은 소비자들의 인식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이 차를 구입하지 않는 소비자들은 ‘잔고장 많은 랜드로버네~’하고 놀리겠지만 이 차를 구입한 소비자는 매우 만족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전히 랜드로버의 이미지가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상품성이 좋아진 신차들을 꾸준히 어필한다면 랜드로버의 이미지 회복 또한 먼 훗날의 얘기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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