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쉐 911 하이브리드가 달갑지 않은 팬들

  • 기자명 박종제 에디터
  • 입력 2020.03.30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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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배우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바로 하나의 캐릭터로 인상이 굳어버린다는 것이다. 어떤 캐릭터를 연기해도 똑같은 인상만 준다면 그의 팬이 아니고서야 그의 연기에서 진정성을 느끼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자동차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자동차의 캐릭터를 이야기할 때 911만큼 색깔이 분명한 자동차도 없을 것이다. 70년 동안 변치 않는 스타일에 리어 마운트 엔진이라는 독특한 구조와 특유의 음색에 이르기까지, 911 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대부분 비슷하다. 오히려 페라리보다 더 단단한 프레임에 갇혀있는 자동차일지도 모른다.

보편적으로 인식되는 캐릭터가 비슷하다는 것은 분명 좋을 때도 있지만, 반대로 스테레오 타입으로 작용해 치명적인 한계로 여겨질 때도 있다. 카이엔을 처음 출시했을 때 일어났던 극심한 아유와 반대 의사를 보냈던 사람들 대부분이 911의 골수팬들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포르쉐에게 911은 그들의 머리를 옥죄어 오는 왕관과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근 포르쉐의 상징이자 동시에 거대한 유리 천장처럼 한계점도 함께 가지고 있는 911에게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하이브리드 모델이 추가된다는 것. 최근 가장 강력한 911, 992 터보 S를 출시한 포르쉐 내부에서 CEO인 올리버 블룸이 하이브리드 버전을 승인했다고 한다.

물론 포르쉐는 이미 몇 대의 하이브리드카를 생산한 경험이 있다.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파나메라 e-Hybrid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두 대의 레이스 카를 하이브리드 타입으로 제작한 경험도 있다. 그들의 프로토타입 스포츠카, 919가 그렇고, 그 이전에 윌리엄스 포뮬러 1 팀에서 플라이 휠 타입의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얻어 제작했던 911R Hybrid도 있다.

이미 완전한 전기자동차인 타이칸이 출시된 상황에, 하이브리드카의 등장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 차가 다른 어떤 모델도 아닌 911이라는 것이다.

이 차에 대해 포르쉐는 “아주 강력하다"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실제로 스포츠카에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탑재될 경우 어느 정도 강력해질 수 있는지는 이미 919 Hybrid를 통해 입증됐다.

지금은 퇴역한 포르쉐의 프로토타입 하이브리드 스포츠카, 919 Hybrid는 2L V4 가솔린 엔진에서는 400~500마력 가량의 출력을 만들어 냈지만, 프런트 액슬에 전기모터를 추가하면서 무려 1,000마력이 넘는 출력을 만들어 냈다고 알려졌다.

(레이스 카의 특성상 정확한 출력은 알 수 없으며, 따라서 기술한 출력은 추정치이다.)

비단 포르쉐뿐만 아니라 페라리나 맥라렌 역시 자신들이 포뮬러 1을 위해 개발했던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그들의 하이퍼카에 삽입하면서 엄청난 출력을 안정적이며 언제든 뽑아낼 수 있도록 설계했는데, 이와 같이 스포츠카에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탑재되면 출력을 보다 간단히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유리한 점이 많다.

특히 911처럼 제한된 실린더와 배기량에서 더 많은 출력을 얻기 위해 필수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터보차저의 경우 아무리 반응이 빨라진다고 해도 어느 정도의 지연 현상은 생기기 마련인데, 여기에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탑재된다면 전기모터의 도움으로 가속 페달을 밟는 순간 머리가 헤드레스트에 파묻히는 현상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게다가 보다 적은 연료로 더 먼 거리를 혹은 더 빠른 속도를 얻을 수 있다는 이점은 스포츠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스포츠카에 탑재할 경우, 자연흡기의 즉각적인 반응과 터보차저의 강력한 출력을 동시에 얻을 수 있으며, 덤으로 높은 효율성까지 챙길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까지만 설명하면 하이브리드 시스템이 스포츠카에게 여러모로 쓸모 있는 시스템처럼 들리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배터리팩과 전기모터의 추가로 인해 발생하는 무게의 증가가 가장 큰 문제다. 정확히 몇 kg 가량이 더해지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순수 내연기관에 비해 하이브리드카가 더 무겁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랜저만 하더라도 2.5 가솔린 모델에 비해 2.4 하이브리드는 약 100kg 가량 더 무겁다.

그랜저와 같은 대형 세단에서는 이 정도 무게의 증가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허나 911과 같은 스포츠카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특히 코너에서 하중의 이동이나 타이어의 부담과 같은 스포츠 드라이빙의 특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무게인데, 스포츠카에서 100kg이 더 무거워진다는 건 런웨이에 서는 슈퍼모델의 체중이 10kg 이상 불어나는 것과 같다.

이론적으로도 이러한데, 911을 바라보는 골수팬들의 입장에서 911 하이브리드 모델의 등장은 전혀 반가운 일이 아닐 것이다. 물론 팬 중 일부는 하이브리드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그저 911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 자체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며, 또 어떤 이들은 타이칸의 등장으로 인해 911마저 전동화가 되어버리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내비친 것일 수도 있다.

허나 위에 서술한 내용처럼 무게의 증가는 비단 911뿐만 아니라 스포츠카의 동역학에 실질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어서 골수팬들의 반대가 단순한 팬심에 의한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을 것이다.

포르쉐 911 최고 책임자, 프랭크 발리스는 911의 마지막 종착역은 결국 전동화가 될 것이며, 다만 자신이 은퇴한 후의 일이 될 것이라 밝히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덧붙였다.

“911에게서 가솔린 엔진을 지키기 위해 계속 싸워 나갈 예정입니다.”

이와 더불어 포르쉐가 밝힌 911 하이브리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로 구성될 것이라 한다. 먼저 효율성보다는 드라이빙 퍼포먼스 위주로 구성될 것이며, 현재 터보차저와 같이 배기가스를 회수해 재사용하는 방식도 함께 채택될 거라는 것이다. 특히 포르쉐 911의 구조적 단점으로 여겨졌던 프런트의 가벼움으로 인해 발생하는 프런트 그립의 저하 문제도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프런트 액슬에 탑재함으로써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따라서 911 하이브리드는 파나메라나 카이엔에 적용된 PHEV 방식이 아닌, 스포츠 드라이빙을 위한 시스템이라는 것이며, 2022년 이후 무렵에나 출시될 것이라 한다. 무엇보다 현재 사용하는 전기자동차의 배터리는 911에게 맞지 않다는 것이 그들의 이야기다. 따라서 새로운 방식의 좀 더 가볍고 컴팩트한 사이즈의 배터리 팩이 적용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와 같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911의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팬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한 가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런던, 파리, 뉴욕 그리고 언젠가는 서울 도심에서도 가솔린 엔진으로 달릴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했고, 자신만의 캐릭터를 팬들에 의해 강요받았던 그 배우가 더 이상 출연할 무대가 없어 강제로 은퇴당하는 일이 조만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언제나 변화는 환영과 진통을 동반해왔다. 하이브리드는 어쩌면 911의 캐릭터를 최대한 연장시키려는 포르쉐의 마지막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비단 911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스포츠카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911의 변화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할 시점이 아닐까?

그럼에도 납득할 수 없다면 이 사실 하나만 기억하자. 120년 전, 페르디난트 포르쉐가 처음으로 만든 자동차 Lohner-Porsche도 하이브리드였다는 사실 말이다.

박종제 에디터는?

F1 레이싱 코리아 전 편집장으로 포뮬러 1과 관련된 뉴스 그리고 레이스의 생생한 이야기와 트랙 밖의 이야기를 다수의 매체를 통해 전해왔다.

레드불 코리아, 한국 타이어 매거진 뮤(MiU) 등의 온/오프라인 채널에 F1, 24h 르망, WRC 등 다양한 글로벌 모터스포츠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모터스포츠 및 자동차 전문 에디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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